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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가는 예뻐 인간은 자유롭게 태어났지만 어디에서나 쇠사슬에 얽매여있다
2019-04-01 16:53 | 조회수 : 4 | 댓글 : 0

장자크 루소에 대해 이야기 해보려 합니다.

칸트의 순수이성과 비판과 맥을 같이 한다고 해야 하나요?

"너의 이성은 정말 순수한 것이냐? 누구에게 주입된것 아니냐?" 뭐 이런류의 의심에 대한 루소판 이라고 이해하심 될 듯 합니다.

 

 

 

장자크 루소는 계몽기로 알려진 18세기 중후반의 소산이자 당시 유럽대륙에서 성행하던 철학의 화신이었다
루소가 활동했던 시기는 인간의 이성이 꽃을 피우는 계몽의 시기였다.
루소는 그들과 함께 하면서도 계몽주의자조차 비판한 사상가였다.
젋은 시절 그는 음악가로 명성을 얻으려고 애썼지만, 1740년에 철학자이자 "백과전서" 편차자인 드니 디드로와 장 르 롱 달라베르를 만나면서 철학에 흥미를 느끼게 되었다.
당시 프랑스는 정치적 분위기가 어수선했다.
프랑스와 영국의 계몽주의 사상가들은 현 상황에 의문을 제기하며 교회와 귀족의 권위를 흔들었고, 볼테르 같은 사회개혁 주창자들은 지배층의 고압적 검열에 끈질기게 맞서고 있었다.
아니나 드를까, 이런 상황에서 루소의 주요 관심분야는 정치철학이 되었다.
그의 생각은 동시대의 프랑스 사상에서뿐 아니라 영국 철학자들의 저작에서도 영향을 받았다.
특히 토머스 홉스가 제창하고 존 로크가 다듬은 사회계약설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그들과 마찬가지로 루소도 가상적 '자연상태'에서의 인간성 개념과 사람들이 문명사회에서 실제로 사는 방식을 비교했다.
하지만 그는 사회의 영향을 받은 생활방식과 자연상태에 대해 근본적으로 다른 관점을 취했기에 그것은 일종의 '반 계몽주의' 사상으로 여겨지기도 했다.
사실상 그의 사상은 다음에 유행할 낭만주의운동의 씨앗을 품고 있었다.

과학과 예술의 폐해

토머스 홉스는 자연상태의 삶을 "고독하고 궁핍하고 추잡하고 야만스러우며 빈약한 삶"으로 묘사했다.
그의 견해에 따르면 인간이란 본능적으로 자기 이익만 추구하는데, 그런 본능을 규제하려면 문명이 필요하다.
반면에 루소는 인간 본성을 더 긍정적으로 보는 한편 문명사회를 훨씬 덜 호의적인 세력으로 여긴다.
 사회가 인간에게 해로우리라는 생각이 루소에게 처음 떠오른 것은 그가 디종 아카데미의 논문 공로에 참가하려고 준비할 때 였다.
그때 루소가 답해야 했던 문제는 이러했다.
"과학과 예술의 진보가 도덕의 향상에 기여했는가?" 당대의 사상가들, 특히 루소 같은 음악가가 으례 내놓을 법한 답은 열렬한 긍정론이었지만, 루소는 정반대 주장을 내놓았다.
당선작으로 뽑힌 "과학, 예술의 진보가 도덕의 향상에 기여했는가? 당대의 사상가들, 특히 루소 같은 음악가가 으례 내놓을 법한 답은 열렬한 긍정론이었지만, 루소는 정반대 주장을 내놓았다.
당선작으로 뽑힌 '과학,예술론'에서 그는 예술과 과학이 도덕을 타락시키고 좀 먹는다는 경악스러운 견해를 제시한다.
그의 주장에 따르면, 예술과 과학은 정신과 삶을 개선하기는 커녕 인간의 가치와 행복을 감소시킨다.

법의 불평등성

공식적 찬사를 받은 수상작에서 기성 사상과 갈라선 루소는 두번째 논문 "인간불평등기원론"에서 앞서 제시한 생각을 한단계 더 발전시켰다.
그 논문의 주제는 당시 분위기와 조화를 이루며 볼테르 같은 작가들의 사회개혁 요구에 공명했지만, 이번에도 루소는 전통적 관념을 조목조목 논박했다.
토머스 흄스가 묘사한 이기적이고 야만스러우며 부조리한 자연 상태는 루소가 보기에 자연인이 아니라 문명인에 대한 설명이다.
그가 주장한 바에 따르면 야만적 상태를 낳은 것은 바로 문명사회다.
인간의 자연 상태는 순결하고 행복하며 독립적이다.
요컨대 인간은 자유롭게 태어난다.

사회의 폐해

루소가 묘사하는 자연 상태는 목가적 전원이다.
그 상태에서 사는 자연인들은 근본적으로 선하다.
사람들은 본유적 덕과 아울러 타인이게 동정하고 공감하는 속성을 타고난다.
그러나 일단 이 순결한 상태가 붕괴되고 이성의 힘이 인간을 자연의 평온에서 이탈시키고 시작하면, 사람들은 타고난 덕성에서 멀어진다.
따라서 자연 상태에서 문명사회가 도입되면 미덕에서 악덕으로의 변화, 목가적 행복에서 불행으로의 변화가 뒤따를 수 밖에 없다.
 루소는 자연 상태에서의 이탈과 문명사회의 수립을 유감스럽지만 불가피한 일로 본다.
그것은 인간의 추론능력에서 비롯했기 때문이다.
루소가 생각하기에 그 과정이 시작된 것은 처음으로 누군가가 어떤 땅에 울타리를 둘러 재산 개념을 만들어냈을때다. 사람들은 이렇게 울타리를  치고 무리 지어 살기 기작하면서, 법률 제도로만 유지할 수 있는 사회를 형성했다.
그러나 루소의 주장에 따르면, 모든 사회는 공감능력등 인간의 타고난 덕을 잃어버리고서 부당하고 이기적인 법을 강요한다.
그 법은 재산을 보호하려고 만든 제도, 즉 부자가 가난한 자에게 지키라고 강요하는 제도다.
그러므로 루소의 지적에 따르면, 자연상태에서 문명 상태로의 변화는 미덕에서 악덕으로의 변화뿐 아니라 순결과 자유에서 불의와 속박으로의 변화도 가져왔다.
인간은 본래 도덕적이지만 사회 때문에 타락한다.
인간은 본래 자유롭게 태어나지만, 사회가 강요하는 법 때문에 "쇠사슬에 얽매여" 살아가게 된다.

사회 계약

루소의 두번째 논문은 첫번째 논문보다 훨씬 더 큰 파문을 일으켰지만, 그 덕분에 루소는 명성과 더블어 상당한 추종자들은 얻게 되었다.
자연 상태를 야만적이 않고 바람직한 상태로 묘사한 그의 이상상은 문학에서 갓 일어난 낭만주의운동의 핵심부를 형성했다.
"자연으로 돌아가라!" 라는 루소의 구호와 근대사회를 불평등과 불의로 가득한 집단으로 본 그의 비판적 분석은 1750년대 프랑스에서 유난히 심화되고 있던 사회적 불안과 잘 어울렸다.
문제점을 언급하는데 만족하지 않고 루소는 그의 저작 중 후세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사회계약론"에서 해결책까지 제시한다.
 루소는 다음의 도전적 선언으로 이 책을 시작한다.
"인간은 자유롭게 태어났지만 어디에서나 쇠사슬에 얽매여 있다." 루소가 "자연으로 돌아가라"고 직접적으로 말한 적은 없지만 자연과 사회의 대비를 통해 이분법적인 잣대를 들이댄 것은 사실이다.
루소에게 인간의 자연적 충동은 건전하고 선량하다.
사회가 인간을 사악하게 만드는 장소다.
인간은 한때 주위의 환경과 조화르 이루며 살았지만 이제는 겉치레와 경쟁,과시적 소비 속에서 살고 있다.
각종 제도는 인간의 영혼을 병들게 하고, 인간을 소외 시킨다.
이러한 방식의 자연과 사회의 이해는 '황금시대' 혹은 낙원으로 부터 추방된 인간의 모습을 따른다는 점에서 당대 계몽 사상가들로 부터 비판의 대상이 되었다.
루소의 선언은 근본적 변화를 절실히 요구하는 말로 여겨졌기에, 27년 후 프랑스 혁명의 구호로 채택되었다.
이렇게 도전장을 던진 후 루소는 대안적 문명상회의 이상상을 제시한다.
그것은 귀족, 군주,기독교가 아니라 국민 모두가 법률 제정에 참여해 운영하는 사회다.
고대 그리스,로마의 민주주의 개념을 본보기 삼아 루소가 상상한 사회에서는 국민 전체가 단일체로서 작용하면 '일반의지'에 따라 법률을 제정한다.
그 법은 모든 사람에게서 비롯되고 모든 사람에게 적용될 것이다.
따라서 모든 사람이 평등하다고 여겨질 것이다.
존 로크는 개인의 권리와 재산을 보호하려고 고안한 사회계약을 상상한 데 반해, 루소는 입법권을 국민 전체에 주어 모두의 이익을 위해 일반의지에 따라 행사하도록 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의 믿음에 따르면, 국민이 입법과정에 자유롭게 참여할 경우 불평등과 불의가 사라지고 사회에 대한 소속감이 강해질 것이며 그 결과 필연적으로 '자유,평등,박애'가 실현될 것이다

교육의 해악

같은 해에 쓴 다른 책 '에밀' 에서 루소는 주제를 넓혀, 교육 때문에 자연 상태가 타락하며 근대사회의 해악이 영속한다고 이야기 했다.
또 다른 책과 논문에서는 전통적 종교와 무신록의 부정적 영향에 주목하기도 했다.
그가 내놓은 모든 저작의 중심에는 이성이 인간의 순결성은 물론 결국 자유와 행복까지 위협한다는 생각이 자리 잡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지성교육이 대안ㅇ,로 감성교육을 제안하는 한편, 신앙이란 머리가 아니라 가슴을 따라가야 한다고 주장했다.

정치적 영향

자신의 책이 대부분 프랑스에서 곧바로 금서로 묶임에 따라 루소는 악명과 더블어 수많은 추종자를 얻게 되었다.
그가 죽은 1778년 무렵 프랑스를 비롯한 여러나라에서는 혁명의 기운이 꿈틀거리고 이었는데, 국민 전체의 일반의지가 입법절차를 통제한다는 그의 사회계약 개념은 부패한 당시 체제에 대한 실용적 대안을 혁명가들에게 제시했다.
그러나 그의 철학은 당대의 사조와 상충했고, 그는 자연 상태가 문명 상태보다 우월하다고 주장한 탓에 볼테르와 흄 같은 동료 개혁가들과 사이가 틀어졌다.
루소의 정치적 영향은 그가 죽은 직후인 혁명기에 가장 강렬히 느껴졌지만, 그가 철학, 특히 정치철학에 끼친 영향은 19세기에 더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예컨대 게오르그 헤겔은 루소의 사외계약 개념을 자신의 철학체계에 통합시켰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나중에 카를 마르크스가 불평등과 불의에 관한 루소의 저작에서 깊은 감명을 받았다는 점이다.
프랑스 혁명 지도자 중 한면인 로베스피에르가 공포시대에 자신의  목적을 달성하려고 루소의 철학을 오용한 데 반해, 마르크스는 자본주의사회에 대한 루소의 분석과 그 사회를 대체할 혁명 수단을 제대로 이해하고 발전시켰다.
마르크스는는 공산당 선언의 말미에서 '프롤레타리아' 가 잃을 것은 쇠사슬 뿐이다. 라는 말로 루소에게 정의를 표하며 노동자들을 선동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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